오! 섹스 공포의 폭력구단

아무 생각 없이 아무밴드를 만나다.

#1 첫만남

그해 여름은 무더웠네, 라고 말해야 옳을테다. 그리고 '아주'라는 낱말로 두세 번쯤 강조해야 더욱 어울릴 만큼 꽤나 무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여름이었다. 그래서 지하로 피신이라도 하고픈 마음이 들었던 까닭일까? 붐은 97년 9월호 커버스토리를 <언더그라운더>로 정했고, 나의 몫으로는 클럽 밴드들에 대한 스케치가 남겨졌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홍대 주변의 클럽들을 이리저리 배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위 잘 나간다는 밴드들보다는 개성 강한 음악을 들려주는 숨겨진 밴드들을 찾고자 했던 것이 그 기획의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주를 듣기 위해 직접 다리 품을 파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수고를 덜어줄 한 가지 방법이라면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본다는 것. 나는 운 좋게 공연을 보게 되었던 몇몇 밴드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또 그들에게서 다른 밴드들을 추천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클럽의 주인 아저씨나 아르바이트 학생들의 조언은 아주 값진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아무밴드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그들은 몇몇사람으로부터 중복 추천을 받은 밴드 중의 하나였다. 내가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그들에 대한 정보는 오직 두 가지.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인상적인 가사와 그것을 읊조리는 보컬이 매력 만점이라는 것.

동료밴드인 '청년단체'와 '고스락'은 아무밴드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해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그해 여름 그들의 공연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무밴드? 단지 그 이름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2. 오랜만의 재회

원고 마감시간에 쫓겨 쉴새없이 바쁘던 지난 1월의 어느날이었다. 내게 한 통의 등기우편이 배달되었다. 소인엔 하루 전 날짜가 찍혀 있었고 보내는

사람의 이름엔 독립 음반사인 '인디'의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안에 담겨진 총 3장의 음반들. 하나는 [클럽 하드코어, 아싸 오방 둘째 앨범]이라는 국내 하드코어 밴드들의 총집결 편집앨범이었고, 다른 하나는 '청바지'라는 이름의 비틀즈 + 산울림 추종 듀오의 데뷔작 [사계]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아무밴드의 것이었다. 어느덧 그들이 데뷔앨범을 발표했던 것이다. 서서히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던 그 이름의 한 장의 앨범과 함께 불현 듯 되살아났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재킷에 담겨있는 이 작품의 이름은 [이.판.을.사], 이 판을 사?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CD 플레이어의 전원을 켰다.

#3. 우연 혹은 인연

나는 맥주를 마시러 집 앞에 있는 <레드 제플린>이라는 술집에 종종 들른다. 글세 그곳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술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혹은 카페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그리고 주말에는 라이브 연주가 이루어지는 곳이니만큼 클럽이라해야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신림역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그곳은 매번 지나칠 때마다 '한 잔 할까'하는 유혹이 들게 하는 곳이다. 그곳엔 장장 10분이 넘는 노래, 딥 퍼플의 'April'을 신청해도 매번 즐겁게 음악을 들려주는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가 있다. 그리고 60~70년대의 올드 록과 아트록들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도 나는 그곳에서 아무밴드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밴드의 리더인 이장혁을 만났다. 그는 꽤 여린 모습과 슬픈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고 있는 내 동료의 술주정을 기꺼이 받아주고 있었다.

#4. 아무 약속 없이 아무밴드를 만나다

그들의 음반이 우편으로 배달되었을 때, 그 보도자료에는 이들에 대한 헤드카피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막에서 연기하는 고독한 판토마임! - 아무 밴드의 데뷔 앨범 [이.판.을.사]"라고, 예전에 [rock 닭의 울음소리]라는 재머스 클럽에서 만드렁낸 편집앨범에 아무밴드는 장장 10분이 넘는 '판토마임'이라는 곡을 실은 바 있다.

그 곡을 듣고난 느낌은 마치 꿈결 속을 걸어갔다 온 듯하다는 것. 상당히 몽환적이며 자유롭고 희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곡이었다. 그리고 이 곡은 이번 데뷔앨범에 다시 녹음되어 삽입되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 중 인상적이었던 것들로는, 흐느끼는 듯한 이장혁의 보컬이 매력적인 'Homophobia'와 어쿼스틱 기타가 인상적인 '사막의 왕' 그리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화산' 등등.

음악적인 완성도 면이나 음질의면을 통틀어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발표한 앨범답지 않은 높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괜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고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칠만한 곡들이 대다수 였다. 나는 음악을 들은 후, 이들의 공연을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습 장면을 볼 수도 있었다. 아무밴드는 요즈음 새로운 드러머가 왔기 때문에 라이브 연주보다는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고 형편상 연습실을 처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레드제플린>을 빌려 틈틈이 손발을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고자 불쑥 그곳을 찾아갔다. 그날은 겨울답지 않게 훈훈한 날씨였다.

#5. 조명없는 무대에서의 연주

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을 몇 번인가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사실 그들에게 물어볼 내용은 너무나도 뻔했다. 그리고 그 뻔한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그들의 특이한 이슈거리에 초점이 맞춰질 것 또한 뻔했다. 그것은 아무밴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획사에서 보내온 이들의 보도자료는 이들에 대한 특이한 사항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것 또한 '이슈'이다. 아무밴드라는 평범하지 않은 그룹명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 그리고 리더 이장혁의 기타는 노가다판에서 주워왔다는 것. 그리고 덧붙여 <헨리와 준>에 등장하는 우마서먼의 사진을 앨범 재킷에 등장시켰다는 것 등등(아, 그 낯익은 여자가 우마서먼 이었군!)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이슈화시키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모두들 이슈화로 흐르는 것 같아요. 그래야 관심이 증폭되고 또 홍보도 되니까..."

그들은 보도자료에서 강조된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밴드라는 그룹명에 대한 이야기는 잘못 알려졌어요." 이장혁은 말했다.

"예전에 소극장에서 어떤 고등학교 그룹이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저희는 그 연주를 지켜보고 있는 입장이었구요. 그런데 옆에 있던 어느 아저씨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비아냥거렸죠. '저런 음악은 아무 밴드나 할수 있겠다'라고 제가 보기엔 꽤 잘 하는 연주였는데..."

그후 밴드명을 짓게 되었을 때 문득 그 당시의 일이 떠올라 '아무밴드'라고 하기로 결정했단다. "그 안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나 메시지가 담긴 것은 아니예요."

아무래도 아무밴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라면 그들의 그룹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특이한 이름이나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풀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습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룹명이 가장 화제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다. 물어 볼 때마다 매번 설명하고 다녀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피곤할까.

#6. 인터뷰 같지 않은 인터뷰

그들의 연습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기타를 치는 이장혁과 베이스의 이상훈은 연주 중에 결코 얼굴을 들지 않더라는 점이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악기를 연주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때도 그냥 그렇게 찍어달라고 했다. 또 한가지 재미 있는 것은 기타와 드럼이 무대의 극과 극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연주한다는 것. 한 폭의 사진에 담아내기 힘든 구 조로 연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날개>라는 이름의 메탈 밴드를 하면서 서 로 만나게 되었죠." 이장혁과 이상훈은 서로 옆 학교를 다 니면서 알게 된 사이였고, 그 후 그룹을 함께 조직했다. 그러다가 이상훈은 음악을 그만두었고 한 3년 정도의 공백 후에 이장혁의 뜬금없는 연락을 받고 다시 밴드를 결성하 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드럼이 언제나 문제였어요. 바뀌는 멤버들마다 불과 몇 개월 지내지 못하고 나가곤 했죠." 자주 드럼이 바뀌는 문제를 물어봤더니, 그들은 군대, 학업 문제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옆에 있던 드러머 김영식은 '혹시 폭력이 문제가 아니었을까'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폭력? 보통의 밴드들이라면 리더 한 명을 중심으로 하는 보스 체제가 대부분임에 비해 아무밴드에게는 멤버들간의 자유 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가 맡은 파트를 존중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각자 일을 세분화 한 것이죠. 그리고 멤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들은 곡을 만들때도 그런 분업을 한단다. 모든 곡은 이장혁이 작사, 작곡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가 곡을 만들어오면 베이스와 드럼의 라인은 그것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살려 입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장혁은 이것을 또 존중해준다. 상당히 민주적인 밴드이다. 그런데그것보다는 자신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겸손 하게 말한다. 이장혁은 "저는 기타를 치고는 있지만 스스 로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나 드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죠."

그들이 인디레이블에서 앨범을 내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97년에 인디가 출발하면서 앨범을 낼 밴드 10팀을 뽑았어 요. 그때 시연회를 했는데 저희를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8팀이 뽑히게 되었죠. 그래서 인디와 인연이 닿은 것이죠." 처음 아무밴드에 대해 얻은 정보는 싸이키델릭 사운드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음악을 '록이 아닌 팝'이라고 말한 다. 록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곡을 만들때도 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만들고 있다고, 그리고 싸이키델릭은 그들 음악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체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멜로디가 좋은 팝을 할 생각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무밴드의 가장 큰 단점은 한가지의 뚜렷한 색깔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말에 수긍은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는 단계라고 덧붙여주었다.

좋아하는 밴드를 물어보았다. 이장혁은 "너무 많은데, 괜찮나요?" 하면서 줄줄이사탕처럼 밴드 이름을 늘어 놓는다. R.E.M, U2, 도어즈, 밥 딜런, 레니 크레비츠, 카운팅 크로우즈, 라이브, 그리고 들국화, 산울림, 시인과 촌장, 어떤 날에 이르기까지. 이상훈은 오직 오지 오스본 을 이야기했고, 김영식은 의외로 레드 핫 칠리 페퍼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같은 과격파 친구들의 이름을 들었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가 너무 어둡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아무 밴드의 음악을 들은 후 은근히 우려가 되었던 점이다. 이장혁은 "삶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단지 희망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커요." 그러면서 그는 2집에서는 조금 더 희망적인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노래해야 할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 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7. 아무밴드에게 아무 이야기나 부탁하다

그들은 언더에서 오버로 바뀌는 것이 커다란 문제이진 않지만 어떤 식으로 넘어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R.E.M 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 과연 우리나라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언더가 오버로 바뀔 수 있을까. 공중파 방송에서 언더그 라운드 밴드들의 음악이 나오길 바라는 것은 차라리 벼락이 떨어지길 바라는 편보다 못하며 대형 레코드점이 아니면 인디 앨범은 취급도 안 해주는 실정이고....

"역시 이것도 시스템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들도 우리나 라의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음악을 하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란다. 하지만 실험적인 정신은 버리고 싶지 않다고 한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있어 실험 적인 면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언더그라운드 안에서도 또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 드가 갈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홍대의 클럽들은 대부분 신나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만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에 오는 관객 들도 대부분 그렇다고. 그렇게 때문에 우리나라의 클럽 씬이 때늦은 펑크 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는 능력이 닿지 않아서 할 수 없는 부분은 안 할 것입 니다. 우리의 역량보다 높은 것을 소화해낼 수는 없지요." 그러면서 인기를 위해 억지로 자신의 스타일과 능력에 맞지 않는 것을 하려는 팀들을 은근히 꼬집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음악 스타일은 클럽 사장들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언더 속의 언더? 그것이 아무밴드의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희망을 품고 있다. 이상훈은 "앨범을 발매 한 것을 계기로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간절한 바람을 밝혔다. 그리고 드럼이 재정비되고 연습이 모두 끝나는대로 클럽에서의 활동을 시작할 것이며 기회가 닿는대로 무대에 올라서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리고는 그들은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함께 술 먹는 일이 거의 없으며 함께 토론을 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오직 연습할 때만 뭉치며 서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고.

#8. 다시 아무밴드를 만나다.

한창 원고 마감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잠시 시간을 내어 <레드 제플린>에 다시 들렀다. 나는 바에 앉아 혼자 맥주를 먹었고, 얼마 후 때마침 이상훈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나는 아직도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를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와 나는 맥주 를 마셨다. 그것이 최근에 그들을 본 기억이다. 하지만 아무밴드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마주칠는지 모른다. 아무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친숙한 모습으로 아무밴드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고 또 기억되기를 기대 한다.

글 - 김훈